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사건때는 56명 사망,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 때에는 168명이 사망, 2017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폭탄 테러 사건 때에는 358명이 사망했다. 발생하면 최악의 인명 피해가 나는 폭탄 테러. 그러던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수만 명이 모인 콘서트장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그런데 희생자는 단 두 명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한 경비원의 기막힌 촉 덕분이었다.
1996년 7월 27일. 올림픽이 한창이던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을 기념해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에서 야외 콘서트가 열렸고 입장료도 무료였기에 공연 전부터 수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리처드 주얼은 현장 경비원 중 1명으로 현장에 있는 5층짜리 음향 설비 인근을 감시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후 자정을 넘긴 시간. RnB 밴드의 오프닝 무대로 콘서트가 시작됐고 모두가 무대를 바라보며 열광하는 가운데, 리처드는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수상한 가방을 발견한 리처드. 그것은 앨리스 팩이라고 불리는 미군 전투 배낭으로, 리처드는 가방 안에 폭탄이 있는 것 같다며 행사 상황실에 알린다. 그리고 얼마 후 폭탄 처리반이 도착 가방을 열어보는데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대형 파이프 폭탄이었다.
즉시 현장에 있던 수만 명의 사람을 앞장서 대피 시킨 리처드. 실제로 13분 후 폭탄은 거대한 굉음을 내며 터졌다. 희생자는 44세 여성 앨리스 호손과 터키 카메라 기자 멜리 우즈니온.
앨리스 호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 파편에 맞아 사망했지만 카메라 기자는 사고 현장을 취재하러 달려가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에 폭탄 테러로 인한 직접적인 희생자는 단 1명뿐이었다.
수만 명이 모인 현장이었기에 자칫하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던 상황. 리처드의 기개와 신속한 조치가 대형 사고를 막았던 것인데. 그러자 언론은 일제히 그를 영웅이라며 치켜세웠고 심지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까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3일 후 언론에 보도된 충격적인 사실. 영웅인 줄 알았던 리처드 주얼이 사실 테러범이라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건 직전 정체불명의 남자가 911에 전화를 걸어 폭탄 테러를 예고했는데 FBI와 폭탄처리반이 출동하기도 전에 리처드가 먼저 폭탄이 든 가방을 발견한 것으로 FBI의 프로파일링 결과 911에 전화를 건 사람과 리처드의 목소리가 매우 흡사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의 전 직장동료 역시 리처드가 폭탄이 든 가방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며 FBI에 신고했다. 이후 FBI는 리처드가 경찰관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임시직을 전전하던 그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그를 유력한 폭탄 테러 용의자로 특정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더욱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리처드 주얼의 아파트를 수색한 FBI. 리처드를 감시하기 위해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해 그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24시간 밀착 감시했다. 또한 리처드의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그를 심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FBI는 3개월에 걸친 조사에도 리처드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고 결국 공식적으로 리처드를 수사 대상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동안 리처드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테러범으로 의심했고, 리처드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났으며, 악명 높은 폭파 테러범 유나바머(Unabomber)에 얼간이를 뜻하는 두퍼스(Doofus)를 합쳐 유나더퍼스, 즉 얼간이 테러범으로 불리며 조롱받아야 했다.
이처럼 테러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한 영웅에서 한순간에 테러범으로 몰린 남자 리처드 주얼. 그런데 9년 후인 2005년.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 폭탄 테러 사건의 진범이 체포되는데, 뜻밖에도 범인은 에릭 루돌프라는 남자였다.
반정부주의자였던 그는 1998년 앨라배마주 폭격 사건 등 여러 건의 폭탄 테러 혐의로 수배되던 중 체포됐고 조사 과정에서 리처드 주얼이 용의자로 몰렸던 테러 역시 본인이 한 짓임을 밝혔던 것이다. 당시 911에 폭탄 테러 예고 전화를 건 사람도 그였다.
하지만 애틀랜타 저널의 기자 캐시 스크럭스가 FBI에서 리처드를 조사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진범인 듯 기사화했고 다른 언론들 역시 연이어 추측성 기사를 써대며 리처드를 범인으로 몰고 갔던 것이었다.
이후 FBI와 언론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리처드. 9년 동안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대인기피증으로 고통받던 그는 조지아주에서 제의한 명예 경관직을 수락, 경찰로 일하며 강연을 다니는 등 바쁘게 살며 상처를 잊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자신을 테러 용의자로 최초 보도한 애틀랜타 저널과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했고 끝내 사과받지 못한 채 2007년 그동안의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돼 사망했다.
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한 폭탄 테러의 용의자였지만 억울한 누명을 벗은 리처드 쥬얼. 이후 시민들은 그를 기리며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리처드의 이야기는 2019년 클린트 이스트 우드 감독의 영화 <더 발라드 오브 리처드 주얼(원제 Richard Jewell)> 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래가 그 영화의 포스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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