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1주년을 맞은 1946년 8월 15일. 구름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한 사람. 그는 백범 김구였다.


그로부터 37년 전인 1909년.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람. 도마 안중근이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의 거목, 김구와 안중근. 그런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인연이 있다고한다. 김구와 안중근은 독립 운동을 시작하기 전 10대 시절,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김창암'으로 태어나 동학에 입도하면서 '김창수'로 이름을 바꾼 김구.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 나선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19살이었다.
같은 시각 불과 8km 떨어진 곳에서 어쩔 수 없이 이에 맞서야 했던 16살의 어린 안중근. 역시 황해도 해주에서 살던 그는 마을의 대주주인 아버지 안태훈이 무너진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직한 민병대의 지휘관으로, 관군의 명령에 복종하기위해 동학군과의 전투에 나서야 했다. 김구와 안중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돌연 후퇴를 선언해서 전면 충돌을 피했고 그후 해주성 점령에 실패한 김구는 자신을 쫓는 관군을 피해 어딘가로 찾아가는데, 놀랍게도 안중근의 집이었다.
1년 전 김구가 이끌던 동학군과 안중근을 앞세운 민병대의 전투가 코앞에 닥쳤던 그때,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김구에게 밀사를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했다.
[안태훈 : 민병대장으로서 일종의 평화 협정을 제안하려 하오. 그대들이 우리를 먼저 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대들을 공격하지 않겠소이다.]
이런 편지를 쓰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며, 안중근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안태훈 :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김창수란 청년, 비록 어리지만 보통 인재가 아니야.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다. 그를 잃어서는 안 돼.]

뛰어난 학식과 혜안을 갖고 있던 안태훈이 김구 같은 인재를 놓칠 수 없다며 서로를 공격하지 말자는 협정을 제안한 것이다. 심지어 곤경에 처하게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까지 덧붙였는데, 그래서 김구가 관군에게 쫓길때 안태훈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안태훈 :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이곳에서 머리도 식히고 마음 편히 지내시게. 그런 의미로 우리 큰아들을 소개하지.]
[김구 : 김창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안중근 : 안중근입니다. 잘 지내봅시다.]
이것이 19세 김구와 16세 안중근,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그후 안태훈은 김구의 부모님까지 데려와 김구 가족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김구는 안태훈의 세 아들인 안공근, 안정근, 안중근, 그중에서 특히 안중근과 종종 시간을 보낸다.
[김구 : 중근은 날마다 사냥 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여러 군인들 중에서도 사격술이 제일이라고 했다.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시키는 재주였다.]
하지만 5개월 후. 김구가 안태훈의 집을 나오면서 헤어지게 된 두 사람. 이후 김구와 안중근은 각자의 위치, 각자의 반경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1896년 사형을 선고받은 김구. 일본인 상인 스치다 조스케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육군 중위로 오해해 폭행, 살해한 혐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김구의 사형 집행이 정지된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 사형집행을 멈추라고 명한것이다.
그날 아침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서류를 살피던 고종이 김구의 죄목에 '국모보수', 즉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는 걸 보고 사형 집행 정지를 결정, 김구가 복역하고 있던 인천 감리소로 전화를 걸어 이를 직접 알린 것이다. 놀라운 것은 당시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과 인천을 연결하는 전화가 개통된 게 불과 3일 전이라는 사실.

고종의 전화 한 통이 훗날 민족의 지도자가 될 한 청년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김구 : 하늘이 날 살려준 건 이 목숨을 의미 있게 쓰라는 거겠지. 그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어.]
한편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안중근 : 내가 죽인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가 맞는 걸까?]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확신하지 못했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시중에 떠도는 자신의 사진을 발견되는 족족 없애버리고는 했다. 그 이유는 독립운동가 원태우 때문.

4년 전 을사늑약 체결 5일 후, 기차를 타고 지금의 경기도 안양을 지나던 이토 히로부미는 원태우가 던진 돌에 정통으로 맞아 뇌진탕으로 쓰러졌고 사경을 헤매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사건 이후 이토 히로부미가 극도로 몸을 사린 탓에 안중근이 그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거사를 추진한 안중근. 기차에서 내리는 맨 앞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그는 암살에 성공한다. 그후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중국 다롄의 여순 감옥에 수감돼 모진 고초를 겪지만, 판사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열변하는 등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일본에 맞섰다.
하지만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일본인인 형식적인 재판 끝에 1910년 3월 26일 31살의 나이에 순국한 안중근. 그런 그가 김구와 인연이 다시 맞닿은 것은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다.
안중근의 사형 집행 후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여순에 도착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당시 법에 따르면 사형수의 가족이 시신 인도를 요청할 경우 언제든 내줘야 했지만 안중근의 유해가 조선인들에게 넘어가면 항일 운동의 기폭제가 될 거라고 판단한 일본이 형제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감옥에 찾아온 형제를 쫓아내 강제 귀국시키는 등 온갖 꼼수를 버리는 바람에 형제는 안중근의 유해를 인도받지 못한다.
결국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아무 흔적도 없이 묻혀버린 안중근.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의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김구 :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유언을 지켜야 해요. 안중근의 유해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합니다.]
김구 또한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일본이 매장 위치에 대한 기록마저 남기지 않은 탓에 찾을 수 없었고, 1946년 김구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중근의 가묘를 만들어 그의 넋을 달랬다.

그런데 3년 후. 김구 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고장에서 김구가 조직한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평소 안면이 있었던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피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이후 김구의 묘는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의 묘의 옆에 나란히 조성되었다.

1894년 열아홉,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일흔의 노인, 서른의 청년으로 드디어 재회할 수 있었다.
한편 두 사람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또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1940년 김구의 장남인 김인이 안중근의 조카 안미생과 결혼하면서 김구와 안중근의 집안은 사돈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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