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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헌법 때문에 군대를 가질 수 없는 일본, 그런데 자위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ˍ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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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헌법과 아베 전 총리

2022년 7월 8일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일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의 선거유세를 이끌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연설 도중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 문이다. 아베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의 애도가 이어졌고 이 사건은 이틀 뒤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수표가 결집하며 집권여당 자민당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 승리로 아베 전 총리의 숙원이었던 평화헌법 개정논의도 더욱 빨라지게 됐다.

 

재임 시절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 개정에 힘을 쏟았던 아베 전 총리. 그는 퇴임하는 순간까지도 평화헌법 개정에 미련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의 근간이 돼온 평화헌법. 시행 75주년을 맞은 지금 일본의 평화헌법이 다시 변화의 기로에 섰다. 

 

평화헌법은 언제 누가 만들었나?

평화헌법이란 '세계 평화를 위한 일본 제재 헌법'을 줄인 말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이 평화헌법이 일본 평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일본은 이런거 하지 말아라고 정해 놓은 헌법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도 경사스러운 날, 광복절이다. 그러나 뒤집어 얘기하면 그날은 곧 일본에게 있어서는 패전일이다. 그날 일본의 천왕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을 7년 동안 받게된다.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군정 사령부(연합군 총사령부)가 일본을 점령하면서 제일 중요한 목표는 바로 비군사화였다. 군인들을 전부 다 무장해제 시켜버리고 군함을 만들었던 미쯔비시 같은 군산복합체를 해체시켜버리고 무용지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의 패전국들 하고 일본이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다. 바로 평화헌법을 만들어줬다는 것. 일본 점령 직후인 1946년, 맥아더 사령관이 평화헌법을 만들어야 되겠다라고 해서 일본에 지시를 했고 그 이듬해인 47년부터 이게 시행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 평화헌법이 지금까지 75주년이 되는 것이다.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이유는?

그런데 평화헌법이 어떤 내용이기에 일본에서 개정하려고 애를 쓰는 걸까? 아래가 바로 평화헌법의 내용이다. 

평화헌법 제9조

①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바라고 구하며, 국제 분행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헌법에서 영구히 전쟁을 포기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교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지금의 일본 보수 우익들 입장에서는 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굉장히 굴욕적이었다라고 주장을 한다.

 

처음에는 미군사령부가 일본 정부에게 먼저 초안을 만들어와라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초안을 만들어서 미군정에게 보여줬더니 단칼에 거절을 당한다. 왜냐하면 일본 천황이 국권을 갖고 있고 천황이 군대를 통솔한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던 것이다. 반성을 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군정 관계자들도 보고 기가 막히면서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헌법을 들고 왔네, 그래서 미국의 초안을 바탕으로 해서 의회를 통과하고 헌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패전국인 독일, 이탈리아는 왜 군대가 있는가?

독일의 경우는 당시에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바로 냉전이 시작되는 단계였기 때문에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서쪽 진출을 막기 위해서 독일의 재무장을 할 수 없이 서로 합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독일의 경우는 주변국들한테 사죄를 진정으로 하고 있으니까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서 큰 불만이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당시에 무솔리니가 국민들에 의해서 축출을 당한다. 그러고나서 연합군에 합류하고 연합군을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항복을 서명한 날이 1945년 5월 8일인데, 일본은 천황이 8월 15일에 라디오로 항복선언을 하고, 그리고 질질 끌다가 9월 2일날 드디어 항복 서명을 한다. 독일보다도 자그마치 4달 이상 버틴데다가, 게다가 이 과정에서 미군이 이오지마라든지 오키나와 상륙 작전에서 인명피해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까 일본은 영원히 군대를 갖지 못하게 해야 되겠다, 이런 게 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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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는 한국전쟁 때문에 생겼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대한민국을 남침한다.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1945년 이후 일본에 주둔해 온 미군 상당수도 한국전쟁에 파병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군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와 해상경비대가 창설된다. 이 준군사 조직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그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 이른다. 바로 일본의 자위대였다. 한국전쟁의 나비효과로 어찌 보면 일본의 자위대가 탄생한 것이다.

 

6.25가 벌어졌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에는 약 8만 7000명의 미군이 주둔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황이 급박해지니까 당연히 그 병력을 한국전쟁에 써야했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러면 일본을 지킬 병력이 필요해진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에는 한국으로 가는 중요한 항구들이 여러곳 있었다. 만약에 중국이나 구 소련이 참전을 해서 거기를 공격한다면 큰일이니까 지켜줘야 될 병력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 해상경비대가  탄생을 하게된다.

 

한국전쟁에 일본이 참전을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리 한국전쟁에 16개국 이상의 연합군들이 파병왔는데, 사실은 일본도 우리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다. 이거는 극비사항이었는데 연구를 통해 공개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이 치열해지면서 주변 해역에 떠다니는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국에는 그것을 수행할 부대가 없으니까 일본 정부에게 그걸 요청한 것이다. 이렇게 바다에 부설한 기뢰 등의 위험물을 제거하는 일을 담당하는 부대를 소해부대라고 하는데, 그들이 한국전 주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공산군들이 깔아놓은 기뢰가 함정에 굉장히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함정들이 지원 포격을 하려면 해변쪽으로 붙어야 되는데 그쪽에다 기뢰를 쫙 깔아놓으니까 정상적인 함포 지원 작전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뢰를 해체하거나 아니면 잘 청 소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구 일본군의 해군 요원들을 불러서 썼던 것이다.

 

원래 경찰예비대, 해상경비대는 구 일본군 출신을 일부러 배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 특별 소해부대 이후로 이제 구 일본군 출신들이 자위대의 전신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6.25전쟁이 일본을 경제성장으로 다시 올려놓은 계기도 됐고, 또 이렇게 군대를 갖게 된 계기도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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