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1차 대전 패망으로 피폐해진 독일에서 뜨거운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을 다시 강력한 국가로 만들겠다며 국민을 선동한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민족주의, 인종주의 신봉자였던 그는 권력을 장악한 뒤 유대인을 박해한다.

유대인 6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광기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 이었다.
"유대인은 늘 다른 민족의 몸에 사는 기생충일 뿐이다."
이렇게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1925년 7월 18일 독일 뮌헨에서 출간됐다. 그런데 같은 해 5월 12일, 독일 아헨에서는 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은 오토 프랑크, 신부는 에디트 홀렌더. 그들 앞에 어떤 비극이 닥쳐올지 짐작도 못한 행복하기만 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1929년 6월 12일, 부부 사이에 둘째 딸이 태어난다. 그 이름은 안네 프랑크이다.

독일 최고 권력자가 된 히틀러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다. 히틀러의 집권이 어떤 의미를 지니냐면 그 전까지는 대중의 감정이었던 반유대주의가 이제는 국가정책으로 실현된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유대인을 배제하고 탄압하는 법률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독일을 떠났던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가 된 히틀러는 유대인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 한다. 1935년 9월, 유대인 혈통이 섞인 국민을 독일인과 구분짓는 것을 골자로 한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법이 통과되고 나치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이송하고 살해하는 절멸작전을 이어간다.
뉘른베르크법에 따르면 유대인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 분리한다. 그리고 또 유대인이랑 결혼, 연애도 안되는,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는 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대인의 약 600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당시에 유럽에 살던 유대인의 인구가 총 1800만 명이었으니 4년, 5년 사이에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진 셈이다.
히틀러는 왜 그렇게 유대인을 싫어했던 것일까?
히틀러가 유대인 친척에게 학대를 당해서, 아니면 유대인 여자 친구에게 차여서, 혹은 여자친구가 돈많은 유대인 남자에게로 떠나버려서, 아니면 유대인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등등 히틀러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춰서 유대인을 싫어한 이유를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히틀러가 아리안인 혈통의 강력한 독일 제국을 만들어야 되는데 여기에 방해하는 유대인들은 절멸시켜야 된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래 독일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반유대주의 감정이 약한 나라였다고 한다. 당시에 반유대주의 감정이 가장 강했던 지역은 프랑스, 동유럽이었다. 그럼 왜 독일이 갑자기 반유대주의 국가의 선두주자가 됐냐면 제1차 세계대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을 했고 전쟁배상금이 부과되고 이후 경제 대공황이 와서 독일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다. 위기상황이 있을 때 사람은 희생양을 찾게 되는데, 그 희생양이 유대인이 됐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독일인이 가지고 있던 당시 위기를 활용해서 그것을 자극하고 극대화 해서 결국 권력을 잡게 된다.
서민들 눈에는 유대인들이 돈 많이 가진 사람, 부자,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인식에 히틀러가 기름을 붓고 부채질을 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전체 국민의 감정이 된 것이다.
네덜란드로 떠나는 안네 가족
안네의 부모님은 상당히 부유했고, 특히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국제 정세에 관한 밝아서 히틀러가 집권하면 위험해질 것을 예상하고, 그래서 독일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첫 번째 목적지는 영국이었다. 만약 영국으로 갔으면 그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영국으로 가지 못하고 네덜란드로 가게 된다.
네덜란드로 간 다음에 거기서 또 사업을 한다. 잼, 향신료 등을 만드는 사업을 해서 거기에서도 꽤 기반을 마련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와 벨기에, 프랑스를 연이어 침공하고 5월 14일 독일이 로테르담을 폭격하자 네덜란드는 항복한다. 5월 15일 독일군은 마침내 안네의 가족이 살고 있던 암스테르담에 진입한다.
은신처 생활의 시작
네덜란드에 있던 유대인 축출을 단행하는 나치를 피해 1942년 7월 9일, 안네 가족은 은신처로 들어 간다. 그 은신처가 어디였냐면 잼 공장의 별채 사무실 위쪽 공간이었다.

책장을 열면 비밀 계단이 나와서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사실 우리가 안네의 일기를 접할 때 주로 동화를 통해서 많이 접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안네는 굉장히 좁은 다락방 같은 공간에 있었구나 이렇게 오해들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략 100제곱미터(30평) 정도였다.

이 비밀 공간에서 안네의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남자친구 페터와 페터의 엄마, 아빠,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치과의사 뒤셀이 살았다.
안네의 방은 위에 사진에서 밑부분의 침대가 두개인 방인데, 이 방을 치과의사와 함께 썼다고 한다. 이곳에 은신하면서 나치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화장실도 정해진 시간에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밝혀진 안네 일기의 비밀 페이지
그런데 안네는 일기장 키티에다가 남들에게는 절대 보여주고싶지 않은 비밀 이야기를 적어놓고나서, 아래 사진과 같이 갈색 종이를 위에다 붙여서 남들이 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두 페이지가 있다.

2018년, 네덜란드 전쟁연구소 연구원들이 이 안네의 일기를 면밀하게 분석을 하다가 조명을 비추는 방식을 이용해서 가려진 페이지의 내용을 알아낸 것이다.

연구원들이 알아낸 내용은 성적인 농담, 피임에 관한 이야기, 성매매에 관한 이야기 등이었다. 그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어떤 남자에게 못생긴 아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자고 싶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그가 집에 돌아오니 자기의 친구가 아내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는 좋은가본데 나는 억지로 해야된다구!]
또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여자 독일 군인들이 왜 네덜란드에 있는지 아니? 남자 독일 군인들의 매트리스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남자가 집에 돌아와보니 옷장 안에 벌거벗은 남자가 있는 것이었다. 옷장 속의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거요."]
이렇게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일기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사춘기 소녀 안네의 조숙함과 성에 대한 관심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안네는 또 '생리'에 대해서도 적어놓았는데, 생리는 여자가 남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는 표시이며 여자가 14살쯤에 어떻게 처음 생리를 하게 되는지에 대해 적어놓았다.
그리고 성의 매매에 대해서도 적어놓았다.
[평범한 모든 남자들은 길거리 여자가 제안을 하면 함께 자러 간다. 프랑스 파리에는 이런 것을 위한 큰 건물이 있다. 아빠도 거기 간적이 있어.]
비밀 일기에서 안네는 성에 관련된 정보들을 부모님, 그중에서 특히 아빠, 그리고 친구인 재클린, 그리고 책을 통해 얻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 매우 중요한데 어른들은 왜 성에 관해서 감추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적었다.
안네의 첫키스
안네는 같이 은신처 생활을 하던 친구 페터와 1944년 4월 15일 첫키스를 하게 된다. 안네는 너무 기뻐서 일기에 그날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들의 입맞춤 장면은 1959년 영화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에서 재현되었다.


영화에서 안네를 연기한 배우의 이름은 밀리 퍼킨스(Millie Perkins)이다. 1938년생으로 영화촬영 당시 20살이었으니까 실제 안네보다는 많이 성숙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안네 역으로 원래 오드리 헵번이 캐스팅 되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발각과 수용소 이송
그런데 첫 키스 그날 121일 후 1944년 8월 4일 오전 10시. 은신처로 나치 그리고 네덜란드 비밀경찰 대원들이 들이닥치면서 결국 이 8명과 그들를 도와준 조력자들을 체포해 간다. 그런데 이들을 밀고한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자기와 자기 가족을 살리는 방법으로 다른 유대인을 밀고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밀고자가 누구인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결국 이들은 1944년 9월 3일에 네덜란드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이송이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에 설립된 최대 규모의 나치 강제 수용소로 대규모 가스실과 시체 처리 시설이 있는 곳이다. 안네 가족과 페터 가족을 포함한 약 1000여명이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역에 도착해서 내린다. 이곳에서 선별과정을 거쳐 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하는데, 이때 529명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529명 중에 페터의 아버지가 포함이 되어서 안네의 은신처에 함께 살던 8명중 제일 먼저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안네의 언니는 독일 경비병에게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안네의 엄마가 저항을 하다가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1945년 1월 6일 사망한다. 그리고 1944년 11월 1일, 안네 자매는 다시 독일 베르겐 벨젠 수용소로 이송된다. 베르겐 벨젠 수용소는 가스실은 없지만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고 너무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여서 전염병이 돌면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망하는데, 1943년에서 1945년 4월 15일 해방될때 까지 약 3만 7천여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45년부터 독일군이 패퇴하게 되면서 영국군, 미국군, 소련군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를 하나하나 해방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였던 오토 프랑크가 1월 27일에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을 찾기 시작하는데 두 딸 중에 언니는 베르겐 벨젠 수용소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고, 안네 프랑크도 언니의 죽음에 뒤이어 장티푸스로 1945년 2월 혹은 3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안네와 언니가 생활하던 베르겐 벨젠 수용소가 해방된 날이 4월 15일이다. 그러니까 한두 달만 더 버텼으면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더 안타깝다.
안네의 일기 첫출간
그후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다. 그리고 5월 2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다. 그리고 5월 7일, 독일이 서방 연합군에 항복한다. 그후 6월 3일,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1946년 4월 16일 베르겐 벨젠에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가 건립된다. 그리고 1947년 6월 25일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첫출간된다.

안네가 쓴 일기는 분량이 꽤 많은데, 우선 두꺼운 키티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 일기가 있고, 대학 공책도 2권이 더 있으며 그리고 낱장으로 360장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유네스코는 2009년에 이 안네의 일기를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한다. 유네스코가 발표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 중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한정된 공간에서 살았던 유대인 8명의 일상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모든 사춘기 소녀가 경험하는 문제들을 다루지만, 또한 세계대전 동안 고통받고 죽어간 수백 만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일기는 전쟁 동안 일기를 남기지 못한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다. 어린 10대 소녀로서 그들 세대의 언어로 이야기한 덕분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수십년 전에 기록된 그의 일기 속에서 그들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이 일기는 전 세계의 학교에서 집단학살과 인종차별 교육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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