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실험
미국에서 작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던 엘리스 셰인.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어 자란 그녀는 35세가 되던 2005년 자신의 생모를 찾기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입양기관에서는 생모가 이미 30여 년 전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일란성 쌍둥이 자매가 있다는 것.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수소문했고 드디어 35년 만에 뉴욕에 있는 쌍둥이 자매 폴라 번스타인과 상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둘은 소름 끼치도록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둘 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 파리 여행을 꿈꾸다 마침내 꿈을 이뤘다는 것.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신문 편집을 했으며 대학에서는 영화를 전공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 태어나자마자 입양됐으면 살아온 환경이 아예 다를 텐데 비슷한 삶을 살았던거죠.
평생 모르고 지낼 뻔했던 쌍둥이 자매를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엘리스는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고 충격을 받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쌍둥이 자매가 각각 따로 입양된 이유가 그녀들이 실험 대상이었다는 것.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자마자 한 입양기관에 맡겨졌던 이들은 지난 1979년 저명한 아동 심리학자인 피터 뉴바우어 박사가 주도하는 실험 연구 대상으로 선정돼 각각 다른 집에 입양됐다는데요.
뉴바우어 박사의 실험은 버나드 프로젝트로 일란성 쌍둥이의 인격 형성에 사회적인 환경과 유전적 성질 중 어떤 것이 더 영향을 미치냐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엘리스는 가난한 가정으로, 폴라는 부유한 가정으로 입양되었구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각각의 입양 부모에게도 이들이 쌍둥이라는 사실은 물론 입양한 아이가 실험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 역시 발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사가 이끈 연구팀은 6개월에 한 번씩 쌍둥이 자매를 관찰했고 키와 몸 상태까지 체크하며 둘의 성장과정을 연구했는데요. 1980년 미국 정부가 쌍둥이 분리 입양 금지명령을 내리면서 박사의 연구팀에도 연구 지원이 끊겼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뉴바우어 박사의 연구도 강제 종료가 된 셈이죠.
뉴바우어 박사는 이 연구 자료를 2066년까지 비밀리에 밀봉해 문서고에 보관했고 엘리스 셰인과 폴라 번스타인 자매를 비롯해 실험에 참가했던 쌍둥이들을 모두 방치했다고 하는데요. 모든 사실을 안 자매는 박사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기가 한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식물도 감정이 있다?
1960년대 미국 CIA에서 거짓말 탐지기 전문가로 활동했던 클리브 백스터 박사. 어느 날 그는 미국 연방수사관들에게 거짓말 탐지기 사용법을 강의하던 중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식물에 거짓말 탐지기를 연결하면 어떨까? 호기심이 발동한 백스터 박사는 책상 위에 있던 화초에 거짓말 탐지기를 연결해 보았는데요.
그리고 여느 때처럼 화분에 물을 주자 갑자기 거짓말 탐지기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 바늘은 마치 화초가 물을 먹은 뒤 숨을 쉬는 듯 평온하게 움직였다는데요. 그리고 물을 다 주고 나자 바늘은 움직임을 멈췄다고 하죠.
흥미를 느낀 그는 화초의 잎사귀 쪽으로 불붙인 성냥을 갖다 댔는데요. 그러자 갑자기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늘. 진짜 식물들이 뭔가를 느끼는 걸까요? 믿기 힘든 실험 결과에 실험을 반복한 백스터 박사. 그런데 계속해서 같은 결과가 나왔고. 결과를 가지고 예일대로 달려간 박사. 흥미를 느낀 생물학 교수들은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합니다.
먼저 4명의 교수 중 3명은 식물에 물을 줬고 나머지 1명은 식물의 잎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자 식물의 잎을 태운 사람이 연구실에만 들어오면 거짓말 탐지기의 바늘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 연구진은 식물도 위험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2개의 화분을 나란히 둔 채 1개의 화분에만 물을 주고 나머지 하나는 말려죽였는데요. 물을 주지 않은 옆의 화초가 서서히 말라 죽고 난 뒤 남은 화초 역시 물을 줘도 전부 다 힘없이 눈금이 움직이다 결국 죽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식물과의 텔레파시 실험. 그는 식물에게 원거리 감지능력도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다 미리 예정한 오후 3시에 화초를 보러 가야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 결과 정확히 3시 정각에 예일대 연구소 내에 있던 화초의 거짓말 탐지기 눈금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식물에게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라고 주장했죠.
많은 실험을 거친 끝에 1968년 백스터 박사는 자신의 연구 보고서를 공개했는데요. 그러자 과학계는 말도 안 된다며 그를 비판. 그의 보고서는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백스터의 연구 결과에 반박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는데요. 놀랍게도 백스터의 실험과 동일한 결과가 도출됐고 그의 연구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발표한 실험 결과가 바로 식물에 칭찬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화초가 잘 자라고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하면 금세 시들거나 죽는다는 내용이라고 하죠.
그러면 진짜로 식물도 생각도 하고 음악도 듣고 화도 나고 이런 감정이 있는 걸까요? 여러 연구에도 불구하고 백스터 박사의 실험은 결정적인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백스터 박사의 식물 실험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기와 침팬지 실험
192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는 신문에서 늑대소녀 기사를 보게 되는데요. 당시 동인도의 한 동굴에서 늑대와 자란 여자아이가 발견됐는데 네 발로 걸으며 늑대처럼 행동했고 구조된 후 교육을 받아 두 발로 걷게 됐음에도 밤이면 늑대처럼 울부짖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켈로그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데요. 저 어린아이의 발달에는 유전적인 영향이 클까, 환경적인 영향이 클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내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기와 아기 침팬지를 함께 키워보자는 것.
끈질긴 설득 끝에 그는 아내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실험에 돌입하게 됐죠. 1931년 6월 26일 부부는 7개월 된 암컷 침팬지 구아를 입양. 10개월 된 자신들의 아들 도널드와 함께 키우기 시작했는데요.
부부는 도널드와 구아에게 똑같은 기저귀를 입히고 똑같은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는 등 모든 상황을 동일하게 만들고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도널드와 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기록했는데요. 매일 키와 몸무게를 재고 지각하는 능력과 운동기능 체크, 심지어는 머리를 두드렸을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를 통해 두개골의 차이까지 기록했다고 하죠.
그리고 부부의 실험이 진행될수록 믿기 힘든 결과가 나타났는데요. 침팬지 구아가 오히려 인간 도널드보다 더 우월한 모습을 보인 것. 막대 도구를 이용해 음식을 꺼내는 실험에서 도널드는 관심이 없는 반면 구아는 단번에 꺼내 먹었구요. 심지어 대소변도 아기 도널드보다 먼저 가렸다고 합니다.
인간 도널드가 구아에 비해서 더 우월했던 건 딱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모방하는 능력. 도널드는 구아가 노는 것을 따라하고 구아가 밥을 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그대로 흉내 냈다고 하는데요. 침팬지는 인간처럼 자라는데 인간은 반대로 침팬지처럼 자라고 있다라는 것이죠. 실험도 실험인데 아기가 잘 성장할 수 있을지 너무 걱정이 되는데 언제까지 실험이 계속되었을까요?
이 실험은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중단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구가 중단될 당시에 침팬지 구아는 사람이 말하는 100여 개의 단어를 구별하는 능력을 보인 반면에 19개월이었던 도널드는 말할 수 있는 단어가 겨우 3개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또래 아이들이 50여 개의 단어로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발달이 매우 늦은 상황이었죠.
이후 침팬지 구아는 자연으로 돌아가 진짜 어미와 살게 됐는데요. 하지만 구아는 진짜 침팬지와 사는 걸 힘들어했습니다. 결국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말았죠. 그리고 인간 도널드는 구아와 떨어진 후 언어 능력이 빠르게 향상됐고 하버드대 의대에 진학해서 정신과 의사가 됐습니다.
이후 도널드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충격적인 결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명문대 출신의 정신과 의사가 된 도널드는 부모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42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연쇄살인마 심리 연구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로스쿨을 졸업한 후 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힘써온 변호사 제이슨 모스. 그는 자신이 연구해 온 것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해 유명세를 떨치게 되는데요. 그가 출판한 책은 바로 <마지막 희생자 연쇄살인범 마음속으로의 진실된 인생 여정>.
그는 대학 시절 프로젝트로 연쇄살인범들의 심리와 정신에 대한 연구를 해 온 건데요. 그러다 그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충격적인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희대의 연쇄살인마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한 것.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살인마는 야밤에 무차별적으로 가정집에 침입하는 방식으로 연쇄살인을 저질러 나이트 스토커라고 불린 리처드 라미레스. 평소 광대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며 최소 33명을 연쇄살인한 광대 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 이외에도 20세기 최악의 살인마 찰스 맨슨. 밀워키의 식인종으로 불린 제프리 다머 등.
이후 그는 이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요. 리처드 라미레스와 찰스 맨슨은 그에게 생일 카드를 보내주거나 직접 그린 그림들을 보내주는 등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연구에 부족함을 느낀 모스는 편지를 주고받던 연쇄살인범들을 직접 만나보기로 결심하는데요. 그렇게 제이슨 모스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연쇄살인범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어 연쇄살인범들의 심리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완성. 연쇄살인범들에 대해 다룬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이 책은 10주 만에 무려 7만 6000부가 팔려나가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각종 방송에도 출연하며 유명세를 떨치게 되죠. 그런데 자신이 쓴 책이 대성공을 거뒀는데도 불구하고 모스는 우울증에 빠져 점점 어두워졌다고 하는데요. 그가 연구를 위해 연쇄살인범들과 친분을 쌓는 과정에서 연쇄살인범들이 그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라며 각종 범죄를 저지르라고 요구를 하기 시작한 것. 사탄 숭배자로 알려진 리처드 라미레스는 모스에게 사탄을 숭배하도록 부추겼고 또 다른 연쇄 살인범들은 그에게 살인을 하라고 압박했다고 합니다. 모스가 연쇄살인범들한테 그들의 추종자인 것처럼 가장해서 접근했으니까 저런 요구를 한 것이죠.
특히 모스는 광대 살인마인 존 웨인 게이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데요. 교도소에서 단둘이 면회 시간을 가지던 중 게이시는 모스에게 "너는 내 통제 하에 있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나는 너를 죽일 수도 있거든." 그리고는 갑자기 모스에게 달려들어 성폭행을 하려고 하기까지. 그 순간 간발의 차로 교도관이 지나가다 이 모습을 포착, 모스를 구해냈다고 하죠.
연쇄살인범들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정신이 피폐해진 그는 결국 정신 이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책을 써 유명세를 치렀지만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 날짜는 공교롭게도 2006년 6월 6일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책 제목대로 그가 마지막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Dear Mr Gacy 라는 영화가 있고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동영상입니다. https://youtu.be/5aaqYRkyn4E
말더듬 실험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괴물실험(Monster Study)이라고 불린 인류 최악의 실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39년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웬델 존슨 박사가 실시한 말더듬 실험.
존슨 박사는 평소 사람이 말을 더듬는 행동이 학습에 의해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품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말을 더듬지 않는 아이에게 너는 왜 그렇게 말을 더듬니라고 계속 말하면 아이가 말을 더듬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고아원에 살던 22명의 멀쩡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하게 되는데요.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에는 말을 참 잘한다며 칭찬해 주고 다른 한 그룹에는 말을 너무 못한다, 자꾸 더듬는다라며 심하게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월간 진행된 실험 결과 끊임없이 혼난 아이들은 결국 모두 말더듬 증상 등 언어장애가 나타났는데요. 존슨 박사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멀쩡했던 아이들에게 말을 더듬는 장애를 만든 셈이었죠. 이 실험에 참여했던 많은 어린이들은 평생 언어장애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는데요. 동료 학자들은 이 실험의 비윤리성에 경악했고 괴물실험이라며 수군댔다고 합니다. 동료 학자들이 이렇게 경악할 정도면 실험하다가 중간에 그만뒀어야 할텐데 어떻게 이렇게 끝까지 이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 당시 나치 치하에 독일이 행한 생체실험이 문제가 되고 있던 터라 아이오와 대학과 존슨 박사의 실험은 비밀리에 이뤄져 이런 실험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존슨 박사는 이 실험을 평생 발표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러다 2001년 이 실험이 공개되며 결국 아이오와 대학은 존슨 박사를 대신해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하게 됩니다.
결국 실험 피해자들은 2007년 이런 잔혹한 실험을 하게 방치한 아이오와주를 대상으로 고소장을 제출, 평생 동안 입은 심리적, 정신적 상처가 인정되어 총 10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실험을 실시한 장본인은 아래 사진과 같이 본인 이름을 딴 건물까지 생기며 말하기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네요.
강제 성전환 프로젝트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남아공에서 실제로 자행했던 잔인한 실험, 혐오감 프로젝트(The Aversion Project). 혐오감 프로젝트는 바로 남아공에서 군에 입대한 사람 중 동성애자를 색출해 강제로 동성애를 치료하고자 한 실험. 즉 동성애는 질병이며 치료가 가능하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런 실험이 시작된 겁니다.
실험 내용은 매우 잔혹했는데요. 우선 전기충격 요법. 동성애자에게 동성 간의 음란물을 보여주고 성적 반응을 보이면 전기충격을 주는 건데요. 전압을 1부터 10까지 높여 고통을 준 후 "더 이상 참을 수 없겠어? 그러면 동성이 아닌 이성에 대해 상상을 해" 라며 강요했습니다. 전기충격 요법이 통하지 않을 때는 신경 절제술이나 화학적 거세를 했다고 하죠.
동성애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험을 하다니 굉장히 충격적인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방법에도 성적 지향을 바꾸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을 썼죠. 강제 성전환 수술이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강제적인 수술을 당한 사람은 무려 90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성전환 수술 중 많은 이들이 사망하기까지.
또한 성전환 수술을 시킨 뒤 제대로 된 후속 조치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성전환 수술을 한 뒤에는 값비싼 호르몬 치료가 필요했지만 아무런 것도 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강제로 성별이 바뀌어 남장이나 여장을 하고 숨어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이로 인해 우울증에 많은 이들이 자살하기까지. 이건 정말 강제로 실험대상이 돼서 삶이 비극적이 된 것이죠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런 실험을 자행한 주체가 누구일까요?
이 실험을 주관했던 사람은 오브리 레빈 의사.
하지만 그는 조사를 피해 캐나다로 도주해 혐오감 프로젝트에 대한 처벌을 면하게 됐는데요. 그러던 어느날 그가 환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됩니다. 버젓이 캐나다의 캘거리 의과대학 법의학과 임상 교수로 재직하던 중 환자 여러 명을 성폭행해 2013년 18년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혐오감 프로젝트에 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네바다 핵폭발 실험
1951년 미국 네바다 사막. 지상 최대의 쇼가 준비되고 있다는 TV광고와 함께 네바다 전역에는 포스터가 붙었고 사람들은 화려한 쇼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빅 샷이라고 불린 이 쇼. 네바다 사막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쇼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사람들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너도 나도 프리미엄이 붙은 앞자리 티켓을 사려고 열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빅 샷 쇼가 열리는 날. 안내원은 빅 샷의 필수품인 고글을 나눠줬다고 하는데요. 쇼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두 고글을 끼자 쇼가 시작됩니다.
네바다 최대의 쇼 빅 샷의 정체는 바로 핵폭발이었습니다. 핵폭발을 무슨 쇼처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본 거였는데요. 이런 것이 허가가 날까요? 여기서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쇼는 미국 정부의 주도하에 진행된 핵폭발 실험이었다는 것.
1994년 한 기자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핵폭발 쇼의 목적은 방사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생체실험이었다는 것이죠.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가 방사능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가 없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민간인을 핵실험장으로 끌어들였고 핵실험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거짓 홍보까지 하며 방송사에도 생중계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는 쇼 홍보를 위해 <미스 핵폭탄>이라는 모델 사진도 제작했다고요.
핵실험이 안전하다고 믿은 사람들은 귀한 구경거리인 핵폭발을 직접 보기 위해 네바다 사막을 찾았고 불과 16km 떨어진 곳에서 핵폭발을 관람한 거였죠. 그렇게 네바다 사막에서는 7년 동안 무려 97회의 핵폭발 쇼가 열렸는데요. 일각에서 핵폭발 쇼의 위험성을 제기하자 1958년 이후에는 네바다 핵폭발 쇼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핵폭발 실험의 결과 군인 40만 명과 민간인 1만 5000명 이상이 방사능 피폭으로 암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네바다 사막은 주로 바람이 동쪽으로 불었고 동쪽 지역의 방사능 낙진이 실려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방사능 노출로 암이나 백혈병에 걸렸다고 하는데요. 과학계에서 실험의 유해성을 제기하자 정부는 조약을 맺어 핵실험을 금지하며 관련된 문서까지 파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이시간부로 미국에서의 핵실험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신문 기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미국 시민들은 분노했는데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는 1인당 5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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