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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보다 2배나 비싼 샤자한의 의자 이야기

ˍ 2022.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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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다가 숨진 사랑하는 아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끝이 보이지 않는 영토와 진귀한 보석들을 거머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인도 무굴제국 제5대 황제인 샤자한.

샤자한

 

"이 세상에서 나의 경쟁자는 모두 사라지게 하라."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세계의 황제.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으니, 바로 뭄타즈 마할 황비였습니다. 

"그 어떤 보석도 당신보다 아름답지 않소."

 

17년 동안 무려 13명의 아이를 낳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두 사람. 하지만 이들의 금슬을 하늘도 시샘한 걸까. 정복전쟁에 나선 황제를 따라나섰던 황비는 전장에서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나를 두고 가면 어떡하오..."

 

그리고 20여 년 후 황제는 황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내고야 만다. 타지마할을 건축한 것이다.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1년에 700~800만 명씩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타지마할이 없으면 '아그라'라는 도시, 더 나아가서 인도라는 나라의 관광 수입에 아마 엄청난 타격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소중한  유산이죠.

 

이 당시의 인도는 전쟁이 곧 일상이었습니다. 당시 샤자한이 황비를 데리로 간 곳이 어디였냐면 데칸이라는 곳인데 인도 중남부의 고원지대입니다. 데칸 고원은 인도 중남부를 차지하는 험준한 고원으로 6월과 10월엔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만큼 무덥습니다. 

수도 델리를 중심으로 해서 북인도에 자리 잡았던 초기 무굴제국이 차차 세력을 넓혀서 인도 남쪽으로 제국을 확장했하기까지 200년 정도 걸립니다. 정말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남쪽으로 정벌 사업을 하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가야했던 것입니다.

 

한 번 원정을 떠나면 짧게는 1~2년. 보통 3~4년 이상씩 걸리기도 했어요. 뭄타즈 마할 같은 경우도 사실 임신한 채로 원정을 따라갔다기 보다는 원정을 따라가던 중에 임신한 것입니다. 뭄타즈 마할은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굉장히 덥고 의료 상황도 열악한 상태에서 39살의 나이에 14번째 아이를 출산한다면 건강한 몸상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혼인 기간이 17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다는데요. 의학적으로 설명을 하면 사실은 수유 기간은 가임 기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가임 기간에는 무조건 임신이 됐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우리 역사에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또 소헌왕후는 30년 동안 10명(2남 3녀)를 낳았습니다.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은 어떻게 만났나?

이 세기의 사랑, 세기의 건축물을 남긴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난 걸까요? 그야말로 우연히 만났다고 합니다. 샤자한 황제가 아직 왕자 시절에 궁정의 여성들이 주로 가는 시장을 갔는데 거기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왔던 뭄타즈마할을 만났던 것입니다. 16살의 왕자가 14살의 귀족집 아가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던 것이죠.

 

그래서 샤자한은 당장 궁으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습니다"라고 선언을 해서 약혼은 금방 했는데, 약혼 후에 결혼을 못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요. 어쨌든 약혼 기간을 한 5년 정도 가지고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에 5년의 약혼 기간이라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긴 것이었습니다.

 

요즘이라면 5년 동안 약혼을 한 뒤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의심할 만하죠. 그래서 그 5년 사이에 사실은 샤자한 왕자는 다른 여성과 결혼도 한 번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략결혼을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뭄타즈마할 이외에도 다른 부인들 여러명이 사료에 등장하는데 모두 다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그런 상대자였다고 합니다.

 

아래 계보를 보면 샤자한의 아버지가 네번째 황제인 자한기르인데 그분도 결혼을 많이 하셔서 아내가 30명이나 되네요. 

우리나라 역사의 고려 태조 왕건의 부인이 스물아홉 명인데, 그보다 1명 더 많네요. 그런데 태조 왕건 같은 경우도 여자를 밝혀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호족들과의 연합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했는데 아마도 샤자한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정략 결혼 같은 경우는 자신의 왕국에 가장 큰 힘이 되는 상대편이 제1순위가 되는 것이다 보니까, 내가 진짜로 사랑하는 여자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데 샤자한도 5년을 기다렸지만 뭄타즈마할을 가장 사랑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료를 보면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은 늘 같이 있고 늘 대화를 나누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다른 부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뭄타즈마할이 이렇게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보통 예쁘기만 하다고 그렇지는 않겠죠. 뭄타즈마할의 특별한 매력이 무엇일까요? 굉장히 지성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재기발랄하고 그야말로 말상대가 될 수 있는,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조언도 아끼지 않는, 그러면서도 정치적 야심이 없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게 일반적이고 원칙인데, 무굴제국은 이슬람 전통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 서열이라는 게 없습니다. 적자와 서자의 구분도 없고 무조건 가장 강한 아들이 뒤를 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왕자들끼리 피바람이 부는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진짜 마음을 기댈 곳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완전 빠질 수밖에 없는데, 그게 뭄타즈마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는 뭄타즈 마할이 죽은 것이죠. 기록에 보면 아내가 죽었을 때 갑자기 하루 만에 머리가  하옇게 되고 등이 굽었다고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타지마할의 구조

디즈니의 알라딘 궁전이 타지마할한테서 영감을 받아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타지마할 부지의 면적은 한 17헥타르, 평으로 바꾸면 한 5만 평 정도 됩니다. 축구장 20개 정도가 들어가는 크기의 부지라고 하네요.

 

아래 사진에서 타지마할의 앞부분에 있는 입구 건물은 붉은색이죠. 이 붉은 돌은 적사암이라고 부르는데 인도 북인도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돌이라고 합니다.

흰색인 타지마할도 원래 안에 골조는 적사암과 다른 잡석들을 섞어서 골조를 만들고 그다음에 바깥 부분만 흰색 대리석 패널로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 흰색의 대리석은 태양과 달이 뜨는 시각에 따라 태양빛, 달빛을 받아서 아래 사진과 같이 다양한 아름다운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특히 위의 사진은 보름달 뜬 날의 타지마할인데 보름달 뜬 타지마할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보름달이 뜬 밤에는 야간 개장을 한다고 합니다. 

 

1631년에서 1648년까지 약 20여 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된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뜻은  "최고의 궁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타지마할의 건축을 위해 그당시 가장 최고의 건축가라는 페르시아의 '우스타드 아흐메드 라호리' 라는 건축가가 초빙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초빙이 됐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제일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게 석공들입니다. 연간 한 2만 명 정도씩 계속해서 석공이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건축현장 주변에서는 석공들이 아예 마을을 이루어서 살고 거기서 자녀를 낳고 그 태어난 아이가 또 석공이 돼서 일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타지마할 건축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이 다시는 타지마할과 같은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 수 없도록 손가락을 잘라버렸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이지은 교수는 "저도 많이 들은 이야기인데 확인해 보기 위해서 여러 책을 뒤졌는데 그런 사실은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그 소문은 그만큼 타지마할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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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된 이유가 아름다운 대칭미입니다. 그냥 딱 접어놓으면 똑같은 데칼코미니처럼 되어 있습니다.

 

타지마할 안으로 들어가면 실내 공간에 아래와 같이 정8각형으로 된 아름다운 울타리가 있습니다. 1층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사실 이것은 가묘입니다.

그러면 진짜 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실제 관은 지하로 내려가시면 또 똑같이 생긴 묘석이 있고 아마 시신은 그 밑에 지하에 있을 겁니다. 바로 아래 사진이 진짜 관입니다. 

그런데 관을 보면 약간 삐딱하게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바로 이 공간이 타지마할 전체에서 대칭이 맞지 않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무덤을 건축했을 때에는 오직 뭄타즈마할 1명만을 위한 무덤이었기 때문에 뭄타즈마할의 무덤은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샤자한 황제가 불행히도 나중에 아들(6대 황제 아우랑제브)이 반역을 일으켜서 폐위됩니다. 그리고 샤자한은 쇠약해져서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도 변변이 치러드리지 않고 그냥 이렇게 큰 어머니의 무덤이 있으니 여기에 같이 묻히셔라라고 해서 옆에다가 아버지의 무덤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장례 문화는 강가 근처에서 아니면 강 위에서 화장을 해서 강에 뿌려주는 그런 이미지가 있는데, 이 화장은 인도의 전통문화지만 힌두교식 장례 풍습이고, 무굴제국 같은 경우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이슬람 왕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장례 풍습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 이슬람교에서는 기독교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매장을 주로 했습니다. 그래서 타지마할이라는 아름다운 무덤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요.

 

힌두교의 나라에서 꽃피웠던 이슬람 문화, 그 절정은 바로 타지마할이라는 건물에서 빛을 보게 됩니다. 샤자한 황제가 타지마할을 야무나강 가에 지은 건 수로와 연못이 있는 물이 흐르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차하르 박이라고 불리는 바둑판 모양의 정원은 그 자체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서 파라다이스, 바로 천국을 상징합니다. 또한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타지마할의 장식은 아라베스크 라고 불리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코란 경전을 새긴 캘리그라피가 주를 이루는데 심판의 날과 천국에 대한 약속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생생하게 표현된 꽃들도 천국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타지마할은 지상에 구현한 이슬람의 천국인 것입니다. 

타지마할에는 모든 벽에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흰 대리석을 파내고 그 자리에 붉은색, 노란색, 녹색, 여러가지 보석들을 또 거기에 딱 맞게 깎았서 끼워넣은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라고 합니다. 아래의 꽃이 이런 방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위의 꽃에서 빨간 것은 가넷이나 루비이고 녹색은 중국에서 수입한 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지마할에는 금도 500kg 정도가 쓰였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제일의 부유한 나라, 무국제국

태양왕으로 우리한테 알려져 있는 루이14세 시대의 재무장관이었던 콜베르의 보고서를 보면 인도 무굴제국은 너무나 부유해서 모든 나라 사람들이 무굴제국으로부터 물건을 사기를 원하는데 그 당시에 결제 수단은 금이었습니다. 그래서 무굴제국으로 세계의 모든 금들이 다 들어가고, 인도로 한 번 들어간 금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무굴제국의 인구만 해도 1억 5000만명 이었고, 그 당시에 인구 20만 넘는 대도시가 9군데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한 나라 안에만요. 그런데 같은 시기의 유럽을 살펴보면 그 정도의 대도시는 파리, 런던,  나폴리, 이렇게 3군데에 불과했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유럽이랑 비교를 해본다면 거의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당시 무굴제국은 전세계 GDP 1, 2위를 다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의 귀족층들, 왕족들은 사치품, 보석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 시대에는 보석 세공 기술이 엄청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유층들은 아래와 같이 화려한 장신구들을 가지고 있었가고 합니다. 

 

샤자한의 왕좌(의자)가 타지마할보다 2배 비싸

자신을 신의 그림자라고 자처한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 그는 아내를 위해 타지마할을 만들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앉는 '왕좌'를 만드는데에 타지마할을 만드는데 들었던 비용의 2배를 들여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아래의 그림이 샤자한이 앉았던 '공작 왕좌'를 묘사한 회화입니다. 보시면 초록색 사파이어로 만든 공작이 의자의 기둥을 떠받치면서 감싸고 있습니다. 

루비,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 등 230kg의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고 , 이 왕좌를 만드는 데 1톤이 넘는 금이 들어갔습니다. 제작기간만 7년이 걸렸는데, 샤자한이 황제가 되자마자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의자에 장식된 전설의 다이아몬드, 코이누르

이 왕좌의 윗부분을 보면 어마어마한 보석, '다이아몬드'를 이 왕좌 제일 위에 장식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코이누르(Koh-i-Noor Diamond)라는 이름의 다이아몬드인데요.

코이누르

코이누르는 무려 186캐럿. 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무굴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가 인도에 가서 황제에 오르자마자 손에 얻게 된 겁니다. 그리고 무굴제국의 황제들에게 대대로 다이아몬드가 전해내려졌는데 이 다이아몬드에는 특별한 전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저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저주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이 다이아몬드를 가진 사람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하지만 최악의 불행을 함께 겪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샤자한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냈고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가 돼서 쓸쓸하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지금은 영국 여왕의 왕관에 장식된 코이누르

그런데 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지금까지 현존할까요? 네,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이 영국 여왕이 쓰는 왕관 한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습니다.

왜 이 다이아몬드가 영국여왕의 왕관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굴제국이 1849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잖아요. 약탈당한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러 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저주에 걸리라고요. 그런데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저주는 신과 여성에게는 이 저주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영국 여왕, 혹은 왕비가 즉위식이나 대관식 같은 공식 행사를 할 때 이 코이누르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을 착용합니다.

그런데 왕관에 박힌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186캐럿이 아니라 105.6캐럿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쳐진 이후에 조금 더 아름답게 광채를 더하기 위해서 커팅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요. 이 코이누르로 만든 왕관은 영국 황실의 공식 행사에서는 등장을 하지만 평소에는 런던탑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무굴제국을 지배한 샤자한.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예술작품인 타지마할을 만들었고,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 2배 비싼 의자, 공작 왕좌를 만들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런데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인조 때로, 우리나라는 양란 이후에 막 허덕이고 있고 전해복구하고 있을 때였는데 무굴제국에서는 정말 보석이 반짝반짝하는 화려함을 누리고 있었네요.

 

샤자한의 또다른 건축물, 붉은성

샤자한의 별명이 있는데 건축광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건축을 통해서 자기의 권력을 과시하는 걸 굉장히 즐겼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 다. 그래서 공작왕좌, 타지마할도 대단하지만, 타지마할을 짓고 난 다음에 지금 현재 델리에 있는 '붉은 성(Red Fort)'과 새로운 무굴제국 수도인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한 것도 샤자한이었습니다. 

붉은성

 

샤자한이 죽은 다음에 세 번째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다음번 황제가 되어서 상당히 오랜 기간인 50여년 정도 재위했는데, 아우랑제브가 무굴제국의 영광스러운 시기를 다스렸던 마지막 황제 입니다. 이미 샤자한 시대 때 지나치게 많은 국고를 소비해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아우랑제브가 사실은 수능 세계사에서 늘 시험에 나온다고 합니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라서 아래의 예시와 같이 반드시 시험에 나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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