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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관한 몰랐던 이야기들

ˍ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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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던 아인슈타인. 이유는?

아래의 동영상은 1945년 6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일본을 향해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이 계속 저항하면 독일과 같은 파괴를 겪게 될 것이며 우리는 일본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 후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폭발 당시 순간 온도는 무려 4000도. 사람이 흔적도 없이 증발할 만큼 엄청난 위력에 민간인 희생자도 2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살상 무기인 원자폭탄의 시작에 한 평화주의가 있었다는 사실.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을 찾아온 남자. 그는 아인슈타인처럼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온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레오 스질라드였다. 그는 독일이 핵을 이용한 폭탄을 개발중이라는 첩보를 아인슈타인에게 알려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평화주의자라는 것.

 

제1차 세계대전과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평화를 지지했던 아인슈타인은 나치 독일이 핵을 이용한 가공할 만한 신무기, 즉 원자폭탄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는 소식에 경악한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된다는 생각에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는 아인슈타인.

 

그는 나치 독일의 상황을 알리며 이를 견제할 최선의 방법은 미국이 그보다 앞서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뿐이라고 강조한다. 덧붙여 자신이 발견한 질량 에너지 등식 E=MC²이 원자폭탄의 원리가 된다는 정보도 전한다. 미국은 곧바로 원자폭탄 개발에 돌입한다. 이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리처드 파인만 등 과학계 거물이 총출동, 현재 우리 돈으로 약 30조 원의 거액이 들어간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 평화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인슈타인은 연구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러던 1945년 히틀러가 목숨을 끊고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필요성이 없어졌으므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중단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낸다. 

 

하지만 미국은 핵폭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 때문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에 모쿠사츠(默殺(もくさつ))라고 대답을 유보한다고 발표했지만, 이 단어에는 묵살이라는 뜻도 있었기에 미국은 일본이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했다고 받아들였고 격분한 나머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다.

 

교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미국 장관의 신혼여행지였기 때문!!

그런데 애초에 원폭 투하지로 결정됐던 건 전혀 다른 도시였다. 미국의 원폭 투하지 선정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대도시일 것, 둘째 전략적 요충지일 것, 셋째는 이전에 폭격당한 적이 없어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곳일 것.

 

회의 결과 1순위로 교토와 히로시마, 2순위로 고쿠라와 니가타가 물망에 오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표적이 된 곳은 문화재가 많아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다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교토였다. 그런데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는 미국의 전쟁성 장관 헨리 스팀슨. 그는 교토의 문화재를 파과한다면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교토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52년 전에 아내와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 바로 교토였기 때문!! 추억의 장소가 원자폭탄으로 사라지는 걸 두고볼 수 없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였다. 당시 스팀슨의 나이는 78세로 미국 관료 중 최연장자인 데다 과거 전쟁에서 공을 많이 쌓았기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교토가 아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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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일 후인 8월 9일, 일본이 여전히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2차 공격을 감행하는데 2순위 후보지 고쿠라와 니가타 중 고쿠라로 향하는 폭격기. 그런데 당시 고쿠라 상공을 가득 메운 짙은 구름. 폭격을 예상한 한 제철소에서 일부러 콜타르를 태워 대량의 검은 연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상공을 세 차례나 선회한 탓에 폭격기의 연료마저 부족한 상황이어서 폭격기는 고쿠라에서 20분 떨어진 나가사키로 날아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 이 운명의 장난으로 투하 당일에만 히로시마 7만 명, 나가사키 4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가 히로시마 원폭으로 세상을 떠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한 희생자 중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의 차남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가 있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에 입대한 그는 평생을 일본의 볼모로 살아야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본을 증오했다. 일본에 온 후에도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사용하고, 반드시 일본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지침을 거부하며 박찬주라는 조선 여인과 결혼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45년 6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경성에 머물던 이우는 일본 본토로 귀환하라는 통보를 받는데 이우가 일본에서 근무할 곳이 하필이면 히로시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8월 6일, 평소와 달리 자동차가 아닌 말을 타고 출근을 하던 중 강렬한 섬광과 굉음, 엄청난 열기와 강풍이 이우를 집어삼킨다.

 

당시 그가 있던 곳은 원폭투하 중심지에서 불과 710m 떨어진 곳. 이우는 얼굴부터 가슴까지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됐고 다음 날 새벽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이우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경성에서 치러졌는데 그날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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