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신호탄과 함께 일본군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했습니다. 작전명 여우 사냥. 목표는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였습니다. 순식간에 왕비의 침소가 있는 건천궁까지 침입한 일본인들. 그리고 일본인의 칼에 무참히 살해당한 후 그 시신마저 불태워진 명성황후. 한 나라의 국모가 궁궐 안에서 살해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맞을까 민비가 맞을까?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준형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민비라고 하는 말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국가의 지위라고 하는 게 변경이 되면서 왕실을 가리키는 존칭 자체가 변화하게 되었거든요. 1895년에 왕은 '주상전하'에서 '대군주 폐하'로 바뀌고 왕비 같은 경우는 '왕비전하'에서 '왕후 폐하'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왕후가 황후까지 올라가게 된거죠. 명성황후에 대해서 민비라고 부르는 것은 낮춰 부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서는 민비라는 말보다는 명성황후라는 말을 좀 더 선택해서 쓰는 것 같습니다."
왜 살해라고 하지않고 시해라고 할까?
시해라고 하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부모를 자식이 죽이거나, 왕을 신하가 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경우에는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시해가 아니라 살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라고 말씀을 하시는데요. 오히려 명성황후의 죽음 자체를 높여 부른다는 의미에서 이전부터 시해라는 말을 써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 자체의 격을 높이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짓을 했는가?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건천궁 곤녕합에서 발견한 후에 건물 밖으로 끌어내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나서는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서 죽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명성황후를 문짝에 얹어서 건천궁 동쪽에 있었던 녹산(경복국 내부에 위치한 구릉 형태의 녹지)으로 옮겨가서 시신에 석유를 뿌려서 불태웠던 일이 을미사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일본의 낭인이 들어와서 명성황후를 죽였다, 이렇게 알고 계신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2021년 11월 16일에 아사히 신문에 보도 되었던 기사가 있는데요.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직접 쓴 편지가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 공사관 영사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라는 사람이 쓴 편지인데,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그 다음 날 10월 9일 고향 친구한테 쓴 편지 내용인데 상세한 경위가 잘 적혀 있습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건물 안쪽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 생각보다 쉬워서 오히려 매우 놀랐다."
그동안 일본측은 시해 사건이 민간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이니까 일본 정부에서는 책임을 안 지겠다는 입장이었는데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 외교관, 일본 군인과 낭인들, 그리고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 훈련대까지 동원이 돼서 계획적이고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신을 불태우라고 지시한 미우라 고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 현지에서 진두지휘했던 게 바로 육군 출신의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미우라 공사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라고 지시를 내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 불태우는 짓까지 했는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증거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라고 생각이 됩니다. 미우라 공사는 사건 직후에 일본이 이 사건에 개입한 바 없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종을 협박해서 친일 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습니다.
그 김홍집 내각에서 사건 직후에 바로 했던 일이 왕비가 죄를 저지르고 궁궐을 떠났다고 주장하며 왕비를 '폐서인' 하는, '일반인으로 그 지위를 떨어뜨리는 조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이런 거짓된 발표를 한 것이죠.
그러면서 김홍집 내각이 명성황후의 죄에 대해서 뭐라고 발표를 했냐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친당을 좌우에 포진해 왕의 총명을 막고 인민을 착취했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라고 발표했다고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명성황후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사치스럽고 권력욕 심하고 부정적인 여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그런 여론을 일본인이 이용해서 '명성황후가 쫓겨날 만했네'라고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거죠. 그러나 일본의 그런 계획이 성공을 하지는 못합니다. 명성황후 폐서인 조치가 발표된 이후에 가장 먼저 반발한 사람은 왕태자(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김홍집 내각은 곧 명성황후를 다시금 빈으로 승격을 시킵니다. 그런데 빈의 지위는 후궁이어서, 정실부인을 첩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서양인 목격자들에 의해서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서인 조칙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사건이 일어난지 두달이 안되는 11월 26일에 명성황후의 지휘가 원래대로 왕후의 지위로 복귀하게 됩니다.
명성황후가 사망한 후 55일 만에 공식적으로 사망했다는 발표가 일어나고 그다음에 장례 준비가 공식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시해 장소였던 건천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고종, 태자, 신하들이 가서 곡을 하면서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에 탄 시신을 발견한 윤석우
훈련대 참위였던 윤석우라는 장교가 불에 탄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누구의 시신인지 몰랐습니다. 일단 발견한 것을 윗선에 보고했는데, 조선훈련대 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이 향원정 연못에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윤석우는 돌아가신 분이 왕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못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하반신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시신이 온전하지 않았던 거죠. 그렇게 수습을 해서 오운각 서쪽 산 아래에 묻습니다. 그렇게 유해를 묻어놨다가 55일 후에 사망이 발표되자 그 시신을 가지고 와서 빈전으로 모시게 됩니다.
불에 탄 시신을 어떻게 염습했는지는 매천야록에 기록이 나오는데 매천야록은 선비 황현이 기록한 조선 말기 비사입니다. 그에 따르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와 재가 모래에 뒤섞인 채 있어서 장례에 익숙한 환관을 불러 그 환관이 유골 중에 없는 부분은 석회를 바르면서 뼈가 있는 부분은 뼈를 넣고 없는 부분은 석회를 채우면서 염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단으로 된 어복을 입혔다고 합니다.
사형에 처해진 윤석우
그러면 명성황후의 유해를 최초에 발견하고 수습했던 윤석우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높은 직책이 부여되고 상을 받았을까요? 하지만 뜻밖에도 이분은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날 행적이 의심스럽고 명성황후의 유해를 멋대로 처리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던 것인데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죠.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서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에 실제로 살해했던 일본인 범죄자들같은 경우에는 일본으로 소환이 되었고, 그리고 조선인 주동자들도 일본으로 망명을 가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윤석우는 재판을 받고 나서도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에는 교수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관파천 이후에는 윤석우의 억울함이 인정이 되어서 나중에는 종2품으로 직급이 높아지고 유족들에게는 위로금도 지급됩니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그해 연말에 동구릉(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에 숭릉(현종 무덤)이 있는데, 그 옆에 명성황후의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공사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섭니다. 그래서 27곳의 후보지를 추천을 받고, 그중에 논의해서 정한 것이 청량리 일대를 정하게 됩니다. 홍릉 수목원 있는 쪽 그 자리 입니다.
그리고 고종은 명성황후를 시해에 가담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을미사적을 체포하여 죄를 물을 것을 선언합니다. 그후 김홍집과 정병하는 백성들에게 맞아 죽고, 유길준과 조희연은 망명을 갑니다.
고종은 자신의 부인이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그다음 칼은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896년 2월 11일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갑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1896년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간 머무른 후 고종은 1897년 2월에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돌아옵니다.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명성황후의 청량리 왕릉 조성을 준비를 합니다.
그후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게 되는데요. 황제라고 해서 전통적인 의미의 중화 질서의 주재자라고 하는 의미를 갖기보다는 만국공법,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국제법상의 하나의 주권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이제 황제가 됐으니까 왕의 나라인 조선을 대신할 황제의 나라 이름이 필요하게 되는데요. 어떤 이름을 지을까 하다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아우르는 한, 그리고 거기에 큰 대 자를 붙여서 '대한'이라는 이름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고 그게 지금까지 온 입니다. 그런데 대한이 단순히 마한, 진한, 변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구려가 나중에 후삼국을 통일한 것까지 포함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삼한일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대한이라고 하는 국호가 나중에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졌고 그것이 현재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많은 비용을 들인 명성황후의 국장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가 되고 나서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명성왕후를 황후로 책봉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황후로 지위를 격상시키는 거죠. 우리가 계속 명성황후라고 지칭하는 것이 그때부터 입니다.
1897년 11월 21일에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졌습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만에 치러진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고종의 황제 즉위식 이후 있었던 첫 번째 공식 행사이자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지 무려 2년 2개월 만에 치러진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의 홍릉에 드디어 묻히게 됩니다.
이틀간 성대하게 치러진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습니다.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남긴 기고문을 봐도 그 규모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데요. 무덤 조성과 장례 비용에만 총 약 100만 달러, 장례식이 치러진 이틀간 사용된 초값만 해도 6500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지인 청량리에 1만 달러 정도 들여서 임시 건물을 세워서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했다고 하고 인류 요리사를 다 동원해서 12가지 코스 요리를 만들어서 대접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명성황후 장례식도 그렇고, 그 이전에 고종의 황제 즉위식도 너무 성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 여전히 중국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고, 또 조선의 독립을 의심어린 눈초리로 보는 그런 외국 또한 많은 상황에서, 주권 국가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명성황후 장례식도 마찬가지였다는 거죠. 우리가 황제국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러한 거대한 행사를 통해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차의 개통
1899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차가 개통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전차를 개통한 이유가 바로 청량리에 있는 홍릉 때문이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고종이 능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까 그 비용을 많이 절감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전차 부설이 건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첫노선의 운행로가 서대문을 거쳐서 종로, 동대문까지 연결해서 홍릉까지 연결되도록 만들었는데요.
그런데 정작 고종은 능행을 할 때 이 전차를 이용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그 전차를 보니까 상여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용을 꺼려 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 딸의 철없는 행동
그리고 고종이 명성황후의 무덤 홍릉을 통해서 또 한 번 대한제국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요. 1905년 9월, 당시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방문합니다.
대한제국 방문에 앞서 앨리스는 상원 의원, 정부 관리들과 함께 아시아를 순방합니다. 그런데 순방단의 대표가 바로 루스벨트 다음 미국 27대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태프트 당시 육군 장관이었습니다. 아래 사진 가운데 남자입니다. 윌리엄 태프트 아래가 앨리스 루스벨트입니다.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 태프트 장관은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앨리스는 일행 일부와 함께 바다를 건너 대한제국으로 넘어옵니다. 대한제국에 현직 미국 대통령의 딸이 왔으니까 앨리스에게 최대한의 환영을 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합니다. 특히 연회를 준비했는데요. 홍릉에서 연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고종의 후궁인 엄비는 3만 원 정도의 빚을 내서 앨리스를 위한 선물까지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회 장소로 홍릉이면 명성황후의 무덤인데 적절하지 않은 장소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데 고종황제에게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홍릉에서 연회를 즐기면서 미국 사절단이 자연스럽게 홍릉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인지 알게 하고 일본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고종이 이렇게 앨리스 일행에게 공을 들였던 것은 또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1905년이었는데, 1년 전인 1904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고종을 중립을 선포합니다. 이 전쟁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러시아는 이를 무시하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고요. 러일전쟁으로 대한제국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종이 가장 신뢰할 만한 국가라고 생각했던 미국에게 또 한 번 희망을 걸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는 고종이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동안 모든 것을 그저 장난처럼 받아들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마치 카우보이처럼 홍릉의 석마를 놀이공원에 온듯이 타고 인증샷을 찍은 거예요.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하나도 없고, 지금 이렇게 하면 세계적인 비난을 받을 일입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몰랐던 고종
그리고 당시 고종이 알지 못했던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앨리스 일행이 대한제국을 방문하기 전에 태프트 장관이 이끌었던 아시아 순방단은 일본 수상 가쓰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바로1905년 7월 29일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죠.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고, 대신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 받는다는 것입니다.
을사늑약(을사조약)
당시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고종은 그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떠날 때까지 정말 성심성의껏 앨리스 일행을 살피고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떠나고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17일, 미국의 힘을 업은 일본은 고종황제를 압박해서 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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