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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이 일어났던 원인 4가지

ˍ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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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킹 폭행 사건

1991년 3월, 한 남자가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영상이 공개된다. 피해자는 26살의 흑인 청년 로드니 킹(Rodney King), 가해자는 LA 경찰서 소속 4명의 현직 경찰관이었다. 당시 가석방 상태였던 로드니 킹은 음주에 마약까지 한 채 과속운전을 하다 경찰에 붙잡혔고 도주하려는 그를 경찰이 무차별 폭행, 과잉 진압한 것이다.

로드니 킹

그러나 1년 후 열린 재판 결과 경찰관들은 모두 무죄. 이 판결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흑인들은 분노에 가득차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렇게 LA는 지옥으로 변한다. 그리고 역사는 이를 이렇게 불렀다. 'LA 폭동'.

 

폭력을 묵인했던 LA 경찰서장

그런데, 이 모든 사태의 시작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1992년 LA 폭동 당시 LA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Daryl Gates).

데릴 게이츠

그는 희대의 사이코인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사론 테이트 살인사건'과, 존 F 케네디 대통령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암살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해결해온 베테랑이었다. 그는 특히 테러, 총격전 등 강력 범죄 현장에 투입되는 미국의 경찰특공대 스왓(SWAT)을 창설, 미국 경찰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이력을 가진 엘리트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지독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다. 평소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용의자가 흑인일 경우 목조르기 기술을 허락하는 등 과잉 진압을 부추겼다. 심지어 1987년, 목조르기를 당한 한 흑인 용의자가 질식사하자, 사건을 은폐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LA 경찰 사이에서 흑인이라면 마구잡이로 체포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이 상황에서 로드니 킹 사건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고 묵인해 왔던 데릴 게이츠는 LA 폭동 이후 진실이 밝혀지면서 14년간 복무했던 LA 경찰서장 자리에서 쫓겨난다.

 

한인타운에 일부러 경찰을 배치하지 않아

이렇듯 백인을 향한 흑인의 분노에서 시작된 LA 폭동. 그런데 분노의 화살이 뜻밖의 방향으로 향한다. 바로 LA의 한인들이었다.

 

거리로 뛰쳐 나온 흑인들이 처음 목표로 삼은 곳은 LA의 대표적인 부촌이자 백인들의 거주지인 베벌리힐스였다. 하지만 이미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어 진입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베벌리힐스와 가까운데다 경찰 인력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한인타운으로 목표를 바꾼 흑인들.

 

이들은 한인을 구타하고 한인 업소를 상대로 약탈, 방화를 일삼으며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터트린다. 그런데 사실 이는 LA 시의 관계자들의 치졸한 계획이었다. 흑백갈등 대신 한인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일부러 한인타운에 경찰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쥬스를 사려던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 사망사건

이뿐만이 아니다. 1년 전인 1991년 발생한 사건이 미국에 전 언론을 통해 다시 집중 보도되기 시작한다. 바로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 사건.

 

이 사건은, LA의 한 슈퍼마켓에 물건을 사러간 15살 흑인 소녀 라타샤가 오렌지 주스를 가방에 넣은 채 계산대로 향하자 라타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쳤다고 생각한 가게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주인이 강제로 가방을 빼앗으려는 순간 라타샤가 주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 차례 가격해서 의자를 던져 맞대응하던 주인이 돌아서는 라타샤의 뒤통수에 총을 발사한 사건이었다. 아래 동영상이 사건 당시의 CCTV. https://youtu.be/quoSOb4GWgg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라타샤의 손에는 2달러가 손에 쥐어져 있었는데, 당시 주스 가격은 1달러 79센트였다. 그런데 라타샤에게 총을 쏜 가게 주인이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이민을 와 가족과 함께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50대 여성 두순자였다.

 

흑인 빈민가에 위치한 그녀의 상점은 이미 30번 넘게 절도 사건을 당한 데다 심지어 최근엔 아들마저 강도에게 구타당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 역시 폭행을 당하자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고 항변했고, 법원은 징역 10년에 집행유예 5년을 최종 선고하며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LA 폭동 발발후 미 언론이 흑인들을 선동하기 위해 한국인 슈퍼마켓 주인이 총을 쏘는 장면만 반복해서 보여주는 식의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그 결과 직격탄을 맞게 된 한인타운은 약 2300개의 한인업소가 약탈당하거나 전소됐으며 약 4억 달러, 현재 우리 돈으로 1000억 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봐야 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LA의 한인들. 그중 중요한 역할을 한 뜻밖의 인물이 있다. 바로 가수 이장희였다.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불 꺼진 창> 등 수많은 명곡을 작사, 작곡 노래한 천재 뮤지션이자 한국 포크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인 이장희. 

 

하지만 그가 만든 노래들이 황당한 이유로 연달아 금지곡이 되자 회의를 느낀 그는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1989년 LA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코리아'를 개국하며 경영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1992년 LA 폭동이 발발하자 그는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24시간 특별 생방송을 단행한다. 당시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방송된 건 바로 한인들의 구조요청 전화였다. 전파를 타고 생중계된 구조요청에 또 다른 한인들이 현장으로 출동해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3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한인들. 이들이 바로 지붕 위의 한인 자경단, 루프 코리안이었다. 한인 사회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대응을 보여준 라디오 코리아와 루프 코리안의 공조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동 발발 6일 만인 5월 4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1만여 명이 넘는 군인을 투입하면서 LA 폭동는 일단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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