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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인질에게 호의를 베푸는 '리마 증후군'의 유래가 된 사건,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

ˍ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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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17일 페루의 수도 리마에 위치한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의 국경일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린다. 그런데 여기에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페루의 반정부 게릴라 단체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의 조직원 14명이 수감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회에 참석한 621명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이것이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 사건이다.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은 스페인 통치에 대항하다 처형된 인디언 '투팍 아마루 2세'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계열의 반정부 무장단체이다.

 

그런데 인질 중 한 명은 바로 한국인이었다. 당시 페루 주제 한국 대사 이ㅇㅇ씨였다. 연회에 참석했다가 돌연 인질이 되어버린 그는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테러범들의 감시를 받으며 각국의 대사들과 함께 수용됐다. 당시 페루 대통령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였는데, 일본인 이민자의 후손인 그는 테러범과 협상 불가라는 원칙에 따라 일본 대사관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시키며 테러범들을 압박한다.

 

이에 테러범들 역시 인질의 목숨을 빌미로 강경하게 맞섰는데, 얼마후 작전을 바꾼다. 페루와 밀접한 관계의 나라인 쿠바, 브라질, 이집트 대사를 석방시켜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쿠바 대사가 한국 대사에게 "페루와 쿠바는 우방국이니 나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겁니다"라며 대신 나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결국 한국 대사는 악몽 같은 72시간을 보내고 극적으로 풀려난다.

 

일본 대사관에 억류된 나머지 수백 명 인질들의 목숨은 암살, 납치, 폭탄 테러를 일삼아 온 악명 높은 테러범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한국 대사는 언론에 테러범들이 인질들을 그렇게 무섭게 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바로 이 단어가 시작된다. '리마 증후군'.

 

대외적으로는 강경했던 테러범들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인질극이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여자와 노인 100여 명을 우선 석방하는가 하면, 건강이 좋지 않은 인질들 역시 조건 없이 풀어주었고 한국 대사를 비롯한 각국 대사와 외교관 수십 명을 방면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처음에는 621명이었던 인질 중 한 달 후 대사관에 남은 인질은 72명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질들은 적십자가 들여보낸 빵과 음료로 모자람 없이 식사한 뒤 책을 읽거나 카드 놀이를 하며 여가를 보내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사실 인질극을 일으킨 테러 조직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은 1990년대 초 주요 인물 대부분이 체포돼 수감되면서 경험이 거의 없는 조직원들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14명의 테러범 중 지도부 4명을 제외한 10명은 10대 후반의 어린 청소년들로,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어린 테러범들은 생애 처음 인질들인 어른으로부터 조언과 충고를 전해듣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인질들에게 피아노와 일본어를 배우면서 더욱 가까워진다.

 

마침내 함께 뛰고 뒹굴며 축구를 하거나 갖가지 주제로 동등하게 토론하는 등 인질들과 테러범들이 공존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심리학자들은 가해자인 테러범들이 인질들에게 미안함을 느껴 호의를 베푸는 이상 현상에 주목했고, 이 사건이 일어난 페루의 리마에서 명칭을 따 '리마 증후군(Lima Syndrome)'이라 이름 붙인다.

 

문제는 테러범과 인질의 깊은 관계 때문에 인질극이 장기화되는 것. 실제로 이번 사건이 종결된 것 또한 장장 126일이 지난 뒤였다. 과연 이 인질극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테러범과의 협상을 거부한 페루 정부는 150명의 특공대원을 조직해 비밀 작전을 펼친다. 핵심은 바로 땅굴이었다. 외부에서 일본 대사관 내부로 진입 가능한 땅굴을 만들어 기습 공격으로 인질을 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근 주택 하나를 매입해 모델하우스로 위장한 뒤 굴착 작업 소리를 숨기기 위해 수시로 헬리콥터를 띄워고, 그렇게 4달이 흐른 1997년 4월 22일, 드디어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50명의 특공대원들이 땅굴을 통해 일본 대사관에 급습하고 이어 100여 명의 특공 대원들이 정문과 옥상으로 진입한 후 맹공을 퍼부었고, 그 사이 인질들은 안전하게 밖으로 빠져나와 72명의 인질 중 71명이 무사히 구출됐다. 1명은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반면 14명의 테러범들은 폭탄에 맞거나 사살되어 전원 사망하는데, 결국 작전 시작 30분 만에 건물에 계양되어 있던 투팍 아마루 혁명기가 끌어내려지면서 126일 동안 계속된 희대의 인질극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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